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문단 편집) == 개요 == 서기 325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후 소집된 최초의 보편 [[공의회]].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 사이에서 교리 논쟁이 일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리를 통일할 목적으로 자신이 거처하던 니케아에 주교들을 소집했다. 황제는 비록 교리에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지만, 공의회를 열기 전부터 교회에서 서열이 높았던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고 본인이 직접 공의회를 주재했다. 황제는 교회가 서로 합의하기 원했고, 아리우스파 주교 5명을 제외한 주교 대략 313명이 찬성 서명을 했다. 이로써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 후 파문하였다. 또한 그때까지는 신자들이 사도전승으로 이어받아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논란을 만들던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 사이 관계[* 요한복음서에도 나오듯이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하느님" 같은 개념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내려오던지라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사실 아리우스파도 이 개념을 정립하려 들다가 나온 이단설이다. 다만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간단명료하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가장 극단적인 해석이라는 위험성도 있었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구절과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구절을 어떻게든 둘 다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던 게 당시의 삼위일체 떡밥인데, 아리우스는 한쪽의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단순하면서도 극단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이는 아리우스파가 단죄되는 원인이 되었다.]를 [[삼위일체론]]으로 정리하여 교리로 선포했다.[* 사실 이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 논쟁, 단성론 논쟁, 단의론 논쟁 등 굵직굵직한 논쟁들이 계속 따라오지만, 이들은 엄밀히 말해 삼위일체론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 삼위일체론 개념은 이론적으로 매우 투박한 부분이 많았고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거듭된 이론화 작업을 거쳐야 했다. 비록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이 정통으로 인정되고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회의가 끝나고 교구로 돌아가서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이러한 상황은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할 때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삼고 아리우스파에 대해 강력한 탄압을 실시하면서 전환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회의를 최초의 공의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니케아 공의회가 최초의 보편 공의회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